2025년 8월 14일 목요일

호젓한 모넴바시아에 어스름 내려앉으면

유수현 지리선생님의 그리스여행3

3일차(나플리오 성채)-4일차(미스트라/모넴바시아)–5일차(스파르타 박물관)

7월 3일(3일차) 오후 찾은 인구 만삼천 명의 나플리오는 1832년부터 2년간 근대 그리스의 첫 수도였다.

바닷가의 팔라미디 성채는 15세기에 베네치아인이 축성한 요새다. 19세기 근대 그리스의 정치적 사건과 음모, 그리고 비극적 사건이 켜켜이 쌓인 곳이어서 다크 투어 모드로 접근했다.

999계단 위에는 감옥으로도 쓰였던, 르네상스 시기의 빼어난 건축물이 넓고 복잡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시내 전경과 푸른 바다의 조화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찰칵, 찰칵.

팔라미디에서 본 나플리오 전경

시내로 내려와 시원한 젤라토를 맛본 뒤 숙소에 돌아오니 협죽도와 부겐빌레아가 반갑게 맞아준다. 곳곳에서 그리스의 여름을 붉게 물들이는 부겐빌레아의 고혹적인 자태는 나그네의 가슴을 가라앉지 못하게 한다.

건조한 날씨 덕인지 모기가 없어, 호텔 창문에도 방충망이 없다.

십자군 원장대의 야만적 발자국

다음날(4일) 스파르타 박물관을 지나 인근 미스트라 유적지로 향했다. 미스트라는 4차 십자군 원정대가 반도에서 노략질을 일삼다 타이게토스산(2344m) 중턱에 세운 성채 도시다.

시오노 나나미는 ‘십자군 이야기’에서 원정대가 그리스와 튀르키예를 지나며 벌인 야만적인 폭력을 잔혹하게 묘사했다. 신자로서 역사적 분노와 죄책감을 느낄 정도다.

그러나 이곳은 한때 비잔틴 제국 최후의 문화·학문의 중심지였다. 그 신비로운 명상적 분위기에 매료된 루소, 바이런, 니체가 사상과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괴테도 이곳에 감명받아 파우스트가 헬레나를 만나는 ‘파우스트’ 2막을 구상했다고 하니 귀가 솔깃해진다. 노원 독서모임에서 ‘파우스트’를 읽다 온 터라 더욱 마음이 간다. ‘인간은 가슴 속 솟구치는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는 비문의 뜻은 아직 잘 모르지만.

비잔틴 제국 최후의 문화·학문의 중심지 미스트라 성채

네 명의 수녀가 살고 있는 성채 안 세계문화유산 궁전과 정교회당을 둘러본 뒤, 마지막 방문지 판타나사 수도원에서는 즉석 합창으로 ‘신자 되기를 원합니다’를 불렀다.

가이드는 그리스에 40년째 거주하는 70세 여성인데 역사·철학·문학·예술·신학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내공이 대단하다.

한국인 관광객들만 쓰고 다니는 양산도 사양하고 쉴 새 없이 해설하는 열정과 여행 마지막 날, 버스 안에서 방문지를 복습·정리해 주는 성실함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모넴바시아에서 그리스 밤 만끽

오후에는 4세기 지진으로 섬과 육지가 연결되었다는 모넴바시아에 도착했다. 해발 100m 섬 뒤편에, 비잔틴·베네치아·오스만 제국의 역사 흔적이 남아있는 중세 건물들이 웅크리듯 모여 있다. 누군가의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여행지’ 목록에 오를 만큼 호젓한 곳이다.

해변의 파도 소리가 긴장을 풀어주고, 어스름이 내려앉으며 감성이 물드는 시간. 우리는 늦은 밤까지 담소를 나누며 그리스의 밤을 깊이 만끽했다.

5일 아침에는 스파르타 박물관을 찾았다. 규모는 작지만, 귀중한 유물이 많아 한참 더 머물고 싶은 곳이었다.

페르시아군과의 테르모필레 전투를 다룬 영화 ‘300’ 속 처절한 장면에서 스파르타 소수 전사를 응원하는 감정을 품는 건 인지상정일까.

스파르타인은 남녀 모두 교육을 통해 지략과 용맹성을 갖춘 강인한 시민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숙형 학원을 ‘스파르타식’이라 부르지만, 주입식교육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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